가을이면 더 깊어지는 ‘주부 우울증'

40대 중반의 주부 박은정(가명)씨는 고층 아파트 베란다 밖을 내려다보는 게 버릇이 돼 버렸다. 머리 속에는 '내가 이 집에 뭐하러 있나' '죽고 싶다'는 생각 뿐, 집에 있는 게 괴로워 나가보지만, 막상 갈 곳이 없어 집 주변을 배회하곤 한다.

우울증 진단을 받은 박씨의 고통은 고부갈등에서 비롯됐다. 함께 사는 시어머니는 아들과 손주를 자기 품에 두려 했고, 며느리에게는 꾸중하는 일이 잦았다. "어머니는 권력을 쥐고 나를 구박하고, 우유부단한 남편은 중립을 지킨다며 내 얘기에 귀 기울이거나 따뜻한 말 한 마디 하지 않는다. 아들도 엄마를 만만하게 보고 말을 안 듣는 게 너무 서럽다"는 박씨는 "집에서 내 자리는 없다"고 했다.

의학적으로 '주부 우울증'이라는 진단명은 없지만 사회적으로 주부 우울증은 엄연히 존재한다. 많은 주부들이 "내가 못나고 쓸모 없다"는 생각에 시달리며 불면증, 무기력, 성욕 감퇴, 체중의 급격한 변화 등의 증상을 보이는 우울증이나 화병으로 힘겨워 한다. 일부는 자살시도를 하기도 하고, 아이와 함께 죽음으로 뛰어드는 비극도 벌어진다.

올해 보건복지부와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실시한 '국민건강 영양조사'에서 중년 여성의 정신과 행동장애 유병률은 2.8%로 같은 연령 남성의 0.6%에 비해 훨씬 높았다. 전문가들은 "주부들이 우울증에 쉽게 걸리는 특별한 환경에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말한다.

주부들의 우울증은 대개 고부갈등, 남편과의 불화나 남편의 외도, 아이의 학교성적 문제 등을 계기로 발병하지만 그 근본에는 오랫동안 일상에서 주부들을 지치게 하는 특별한 시나리오가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고려대학교 학생생활연구소 부설 호연심리상담센터의 임상심리전문가 한기연 박사는 "누구나 인생에서 힘든 일을 겪지만 주부는 그런 위기에서 자신을 지탱해줄 정체감을 확고하게 갖기 힘든 상황에 있다. 주부 우울증은 정체성의 문제"라고 말한다. "온전히 자기가 주도하는 활동이 별로 없고 자신의 가치가 남편과 아이를 통해서만 표현되는 생활"이 가장 큰 함정이다.

실제로 우울증 진단을 받는 많은 주부들이 처음에는 자식과 남편 문제로 병원이나 상담소를 찾는다. 아무 데나 오줌을 싸고 불안해하는 5살 딸의 손을 잡고 온 30대의 권지영(가명)씨는 1주일에 50분 정도의 진료 시간을 내기가 어렵다고 했다. 딸은 영어 발레 피아노 운동 학원에다, 레고 과외까지 받고 있었다. 권씨는 아이를 데리고 이 학원 저 학원으로 다니느라 저녁 식사 준비할 시간이 없을 정도였다. 상담자는 "이 정도면 아이 문제가 아니라 엄마의 병적인 불안"으로 판단해 권씨에 대한 치료를 시작했다.

대기업에 다니다 벤처기업으로 옮긴 뒤 새벽에야 퇴근하는 남편 때문에 힘들다는 한 여성은 "아무리 남편의 처지를 이해하려 해도 남편의 삶에서 내가 밀려나는 것 같아 견딜 수가 없다. 복수랍시고 커피숍 등에 밤늦게까지 앉아 있어보지만, 남자들이 여 종업원과 농담을 하는 것을 보게 되면 남편도 저럴 것 같다는 생각에 더 괴롭다"고 했다. 심리학 박사 안귀여루씨는 "가족과의 관계가 주부의 인간 관계를 거의 다 차지하기 때문에 남편의 외도나 아이의 반항은 그 동안의 삶이 한꺼번에 무너지는 것으로 여겨진다. 내가 어떻게 살았는데 이럴 수가 있느냐는 등 맺힌 게 터지면서 우울증으로 나아간다"고 설명한다.

많은 주부들은 정신없이 변하는 세상에서 나만 뒤쳐진다는 불안감에도 시달린다. 빠르게 질주하는 사회는 '어머니를 위한 자리'를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밥하고 빨래하는 노동은 온 가족의 생계에서 중요했고, 가족들은 적어도 어머니가 생활의 핵이라는 정서는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기계문명이 발달하면서 가사노동에 대한 그런 평가마저 사라졌고, 여성도 그런 가사노동에만 의미를 부여하기엔 학력이 높아졌다. 사회는 여성의 일자리와 육아 시설을 제대로 갖추지 않은 채 애 낳은 여성을 가정으로 다시 떠밀곤 한다.

아이들은 두 돌만 지나면 벌써 어린이집으로 향하고 새벽에 나가 늦은 밤에나 돌아오는 남편과 학교와 학원을 순례하느라 바쁜 아이들이 없는 긴 시간이 주부에게 돌아온다. 이전의 경력과 학력을 살려 다시 일자리를 찾기는 불가능하고, 여성들은 문화센터 강좌나 운동, 백화점, 사우나 등으로 발걸음을 돌린다. 물론 주부의 노동에서 보람을 찾는 이들도 있지만, 많은 여성들이 허전함을 느끼고 자신이 쓸모 없으며 뒤쳐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것도 사실이다.

심리학자나 정신과 의사들은 "여가는 어디까지나 여가다. 인간은 기본적인 욕구가 충족된 다음에는 의미 있는 일을 찾아야 한다. 주부들이 가족과의 관계에서가 아닌 자신 자신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한기연 박사는 "적어도 계속 일하고 싶은 여성이 육아 문제 때문에 직업을 포기하도록 사회가 더 이상 방조해서는 안 된다. 육아 시설 하나만 잘 되도 젊은 여성은 직장을 그만 두지 않아도 되고 많은 여성들이 육아시설에서 일자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변화가 주부 우울증을 줄일 근본적인 대책"이라고 말한다.

또 여성들이 특히 50대 이후 자꾸만 여기 저기 아플 때도 우울증을 의심해봐야 한다. 아기들이 엄마의 주의를 끌기 위해 보채는 것처럼 여성들도 무의식적으로 몸이 아픈 것을 통해 애정을 받고 싶다는 '구조신호'를 보내기 때문이다. 특히 정신질환에 대한 편견이 심한 우리나라에서 마음의 병이 억압돼 몸의 병으로 나타나는 일이 많다. 또 폐경 이후 여성 호르몬이 급격하게 감소하기도 하지만 '여성으로서 끝났다'는 과도한 의미부여를 하면 우울증의 위험이 더 높아진다.

(20011016 한겨레에서)